도자와 마사노부 (16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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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자와 마사노부(1640년)는 신조 번의 2대 번주이다. 1640년에 태어나 1648년 아버지 도자와 마사모리의 사망 후 가독을 상속받기까지 어려움을 겪었으나, 1650년에 상속을 허가받았다. 그는 번주의 권력 강화를 위해 가신을 살해하고, 세제 정비, 영내 개발 등 개혁을 단행하여 신조 번의 최성기를 이끌었지만, 말년에는 방만한 경제 정책으로 재정을 악화시켰다. 1710년 양자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1722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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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와 마사노부 (1640년) | |
---|---|
기본 정보 | |
씨명 | 도자와 씨 |
이름 | 도자와 마사사다 |
다른 이름 | 지요쓰루 (어린 시절 이름) |
계명 | 다이키인 호잔 도쿠코 |
묘소 | 야마가타현신조시의 가이가쿠지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중기 |
출생 | 간에이 17년 10월 13일 (1640년11월 26일)『최상군사료총서』「도자와연보」(갈록사, 1925년) 16쪽 또는 같은 해 7월 13일 (8월 29일)이라고도 함『신조고로각서』(1918년) 121쪽 |
사망 | 교호 7년 2월 3일 (1722년3월 19일) |
관직 | |
관위 | 종5위 하, 노토노카미, 가즈사노스케 |
가문 |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미쓰→이에쓰나→쓰나요시→이에노부 |
번 | 데와국신조번 번주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도자와 마사모리 어머니: 오사코 (규조인・나라오카 미쓰노부의 딸) |
형제 | 도자와 사다모리 정실, 가토 야스오키 계실, 마사사다 |
배우자 | 정실: 아사노 미쓰아키라의 딸 |
자녀 | 마사타케 (셋째 아들), 딸 (구루시마 미치마사 정실), 딸 (아오키 시게노리 정실), 스와코 (도자와 마사시게 정실) 양자: 마사쓰네 |
번주로서의 정보 | |
전임 | 도자와 마사모리 |
후임 | 도자와 마사쓰네 |
직책 | 신조번 번주 |
대수 | 2 |
임기 | 1650년 ~ 1710년 |
2. 생애
신조 번 초대 번주 도자와 마사모리의 차남으로 1640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사후 어린 나이와 상속 절차 문제로 인해 2년 뒤인 1650년에야 번주 자리를 이었다. 번주가 된 후에는 가로 숙청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세제 정비, 영지 조사, 자원 개발 등 다양한 개혁을 단행하여 60년에 걸친 치세 동안 신조 번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치세 말기에는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번의 재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1710년 양자인 마사쓰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였으나 실권은 계속 유지했으며, 1722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간에이 17년(1640년), 신조 번 초대 번주 도자와 마사모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게이안 원년(1648년)에 아버지가 사망했지만, 마사노부가 어렸고 임종 시 상속 절차 문제로 인해 즉시 가독 상속을 인정받지 못했다. 번 측에서 에도 막부의 로주였던 마쓰다이라 노부쓰나 등 막부 요인들에게 청원한 결과, 게이안 3년(1650년) 8월 7일에 이르러서야 상속이 허가되었다. 이는 당시 막부가 토자마 다이묘를 다루는 방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 또한, 번주가 2년 동안 공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번이 개역(改易, 영지 몰수)되지 않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2. 2. 번정 개혁과 신조 번의 전성기
게이안 3년(1650년) 8월 7일, 아버지 도자와 마사모리의 뒤를 이어 신조 번의 2대 번주가 되었다. 아버지 사후 상속이 즉시 인정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에도 막부의 토자마 다이묘에 대한 경계심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 번주 부재 기간이 2년이나 되었음에도 개역되지 않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번주가 된 마사노부는 번주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만지 3년(1660년) 5월, 가로(家老) 가타오카 리헤이片岡理兵衛일본어 일족을 처형하는 사건(가타오카 소동)을 일으켰다. 또한 번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주요 개혁 내용으로는 세금 제도 정비, 영지 내 토지 총 조사(검지), 나가마쓰 동산長松銅山일본어 개발, 사찰 건립[3], 성하 마을城下町일본어 정비, 새로운 가신 고용 등이 있다.
마사노부의 치세는 60년에 달했으며, 이러한 개혁을 통해 번정은 안정되고 신조 번은 최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의 대담하고 방만한 경제 정책은 치세 말기에 번 재정 악화의 원인이 되었다. 더불어 마사노부는 사치스러운 성향이 있어 문인과 학자들을 등용하고 후원하는 데 비용을 아끼지 않아 재정 부담을 가중시켰다고 전해진다.
호에이 7년(1710년) 2월 16일, 양자인 마사쓰네에게 번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거했으나, 죽을 때까지 실권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4]. 그는 오랫동안 건강하여 영지 내 온천을 걸어서 다니고, 60세가 넘어서도 매사냥을 즐겼으나, 80세 무렵부터 쇠약해져 교호 7년(1722년) 2월 3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사노부에 대해 『土芥寇讎記|도카이코슈키일본어』는 그가 나쁜 군주는 아니지만, 남색과 美童|미동일본어을 좋아하는 점을 고치면 더 나은 군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쿄 3년(1686년)에 친아들 마사타케政武일본어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자 이를 슬퍼하며, 아버지 마사모리가 간에이 2년(1625년)에 창건한 조쇼잔 만넨지常照山萬年寺일본어의 이름을 "케이가쿠지桂嶽寺일본어"로 바꾸었다. 역대 번주 중 유일하게 마사노부만이 케이가쿠지에 묻혔으며, 아들 마사타케의 묘소도 같은 절에 있다.
2. 3. 번 재정 악화와 말년
마사노부의 치세는 60년에 달하는 장기간에 걸쳐 번정을 안정시키며 신조 번의 최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대담하지만 방만한 경제 정책은 치세 말기부터 번 재정 악화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사치스러운 성격과 더불어 문인 및 학자들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 역시 재정 부담을 가중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호에이 7년(1710년) 2월 16일, 마사노부는 양자인 마사쓰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하지만 은퇴 후에도 사망할 때까지 실권을 계속 유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4]. 그는 오랫동안 건강을 유지하여 영지 내 온천을 직접 걸어 다니고, 60세가 넘어서도 매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80세에 가까워지면서 건강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교호 7년(1722년) 2월 3일,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물 평가로는 『도카이코슈키』에서 그가 나쁜 군주는 아니지만, 남색과 미동을 탐닉하는 경향을 버렸다면 더욱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조쿄 3년(1686년)에 어린 아들 마사타케를 잃은 슬픔으로, 아버지 도자와 마사모리가 간에이 2년(1625년)에 창건했던 조쇼잔 만넨지의 이름을 '케이가쿠지'로 바꾸었다. 역대 번주 중 마사노부만이 이 케이가쿠지에 묻혔으며, 그의 아들 마사타케의 묘 또한 같은 곳에 있다.
2. 4. 평가
마사노부는 번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만지 3년(1660년) 5월에 가로 가타오카 리헤이 일족을 살해하는 사건(가타오카 소동)을 일으켰다. 또한 세금 제도 정비, 영지 총 검지, 나가마쓰 동산 개발, 사찰 건립[3], 성하 마을 건설, 새로운 가신 고용 등 다수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치세는 60년에 달하는 장기간에 걸쳐 신조 번의 행정은 안정되었고 최성기를 맞이했다.그러나 대담하고 방만한 경제 정책으로 인해 마사노부의 치세 말기부터 번의 재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사치스러운 성격으로 문인과 학자를 등용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고 전해진다. 호에이 7년(1710년)에 은거했지만, 죽을 때까지 실권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4].
『도카이코슈키』에서는 마사노부를 나쁘지 않은 군주로 평가하면서도, 남색과 미동을 좋아하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그만두면 더 나은 군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3. 가계
- '''아버지''': 도자와 마사모리
- '''어머니''': お佐古|오사코일본어(久昌院|큐쇼인일본어) - 번신 나라오카 미쓰노부(楢岡光信)일본어의 딸
- '''정실''': 市|이치일본어 - 아사노 미쓰아키라(浅野光晟)일본어의 딸
- '''자녀'''
- * 도자와 마사타케(戸沢正庸)일본어 (삼남)
- * 쿠루시마 미치마사(来島通昌)일본어의 정실
- * 아오키 시게노리(青木重矩)일본어의 정실
- * 諏訪子|스와코일본어 - 도자와 마사나리(戸沢正誠)일본어의 정실, 도자와 마사타다(戸沢正産)일본어의 양녀
- '''양자'''
- * 도자와 마사타다(戸沢正産)일본어 - 번신 나라오카 토모키요(楢岡友清)일본어의 넷째 아들
참조
[1]
서적
最上郡史料叢書
葛麓社
1925
[2]
서적
新庄古老覚書
1918
[3]
문서
元禄4年(1691年)の鳥越八幡神社など。鳥越八幡神社の本殿と拝殿は国指定重要文化財。
[4]
문서
養子の正庸は親族ではあるが藩家臣筋でもあるため、藩内の安定を図ったとも考えられる。正庸の後継にも、自身の娘に婿養子を迎えて相続させるように指示していた。この婿養子の[[戸沢正成]]はしかし、正庸よりも先に死去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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